" 보고 싶어? "
고개가 돌아갈 때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야 할 것 같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 망가지고 굳어진 태엽을 돌리듯 힘겹게 너는 고개를 돌린다. 텅 빈, 풀린 동공의 눈동자에 희미하게 초점이 돌아올 때 나는 다시 한 번 묻는다. 그 여자, 보고 싶냐고. 창백하게 질려 조각한 대리석 같은 너의 손을 의자의 팔걸이에서 떼어낸다.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너의 손은 비어 있다. 나는 이렇게나 너를 위하는데 너는 고작 말 한마디를 못 해줘? 고작, 노래 한 소절을 못 불러? 끓어오르는 분노 사이 희미한 동정이 죽어가며 비명을 지른다, 울부짖는다. 네가 아픈 게 나를 아프게 하는 거 너무 싫어, 내가 아파도 너는 아무렇지 않은데. 그러니까 결국 모든 고통은 나의 몫이 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너를 위하여 나는 남겨진 길이 하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결국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란 없었고 모든 것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너는 쉽게 말하겠지만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어. 모든 가능성을 죽이고 모든 길이 막혀 있음을 기어이, 발이 부르트고 닳도록 걸어 확인했으니 남은 것이 절벽뿐이라고 너는 말했다, 텅 빈 눈으로 말했다.
" 내가 만나게 해 줄까? "
당신은 이제 나를 알게 될 거야. 낮은 목소리가 어둠 속에 울렸고, 모든 즐거웠던 시간이 가라앉는다. 나의 진실은 가혹하고 잔인해, 당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만을 모아 놓은 나의 세계는 당신이 있을 곳이 아니야. 에릭은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다가올 시간이라면, 감당해야 하는 아픔이라면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기다리느니 차라리 앞당겨 감내하는 편이 나았다. 당신은 여기 오래 있지 않을 거야, 그러지 못하겠지. 당신은 빛이고, 봄이면서, 아침이니까. 이곳은 영원한 겨울이고 어둠이면서 오직 밤이 계속될 테니까. 이곳은 당신을 시들게 하고 빛바래게 하겠지, 나는 그걸 원치 않아. 노래하지 않음에도 당신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다. 단어 하나하나에 녹아들어 있는 따스함을, 애써 새어나가지 않도록 포장한 그 사랑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크리스틴은 건네받은 시집을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름다운 시간, 행복했던 순간들. 나에게 꿈을 꾸게 해 주고 절망의 순간에서 구해 준 한 사람, 이제 그 사람이 나에게 아픔을 말하고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고 하네. 떠나라고 등 떠미는 당신의 손길에 가득한 미련을 나는 느낄 수 있는데, 당신과 나 누구도 이별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데. 당신이 찢어지는 마음을 움켜쥐고 나에게 작별을 고하는데 어떻게 내가 당신을 두고 떠날 수 있죠, 크리스틴은 시집이 젖지 않도록 조용히 눈물을 훔치다가, 도저히 손으로는 가릴 수 없어 차라리 시집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차가운 샴페인이 반짝거렸고, 그 빛은 어느 겨울날 꿈꾸었던 난로의 온기처럼 따스하면서도 차가워.
누구도 타인에게 관심 없는 이 세상에서, 모두가 모두에게 적이고 경쟁자인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 너를 이해하고 있어. 나만 너를 생각하고, 나만 너를 알아. 네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지, 네가 얼마나 마음이 여린지. 네가 얼마나 아름답게 연주하는지 나만 알아. 네가 사실은 얼마나 힘든지, 명예도 권력도 다 필요 없이 그냥 인정받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아. 네가 정말 원하는 걸 아는 건 나뿐이고, 앞으로도 오직 나 혼자야. 네 곁에 남아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나를 제외하면. 모두가 너를 욕하고, 외면하고, 흰 눈을 뜨고 바라봐도 너는 내가 있으니까 힘을 낼 수 있고, 웃을 수 있고, 앞으로 걸어갈 수 있어. 세상에 단 한 사람, 나만 있으면 너는 아무래도 다 상관없어. 너는 끊임없이 노력하고, 나는 그런 너를 위해 노력하고, 그런 나를 보면서 너도 더욱 힘을 내는 거야. 우리는 서로로 완벽하고 여기서 무엇 하나 더하거나 뺄 것도 없이 온전해. 네가 더 환하게 빛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네가 더 환하게 빛날 수 있는 이유도 전부 나야. 내가 없으면 너는 많이, 아주 많이 슬프고 외로울거야. 지금보다 훨씬 더 외로울 거야. 너는 내가 없으면 안 돼, 이 끔찍한 세상에서, 누구도 배려하지 않고 누구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네가 믿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친구는 나뿐이잖아. 다른 누구도 너를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해서도 안 돼. 다른 누구도 너를 알아서는 안 돼, 다른 누구도 너를 좋아해서는 안 돼. 이 미움 가득한 세상에서 사랑은 오직 나뿐이야.
괜찮다는 말은 이렇게 아프지. 당신은 괜찮다고 말하면서 몇 번이나 입술을 씹었을까, 몇 번이나 혀를 깨물었을까. 입술은 괜찮다고 말하는데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었다. 차라리 입술을 찢어버리면 좋겠어, 어떤 말도 꺼낼 수 없다고 핑계라도 댈 수 있도록.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움켜쥔 손을 애써 빼려 하지도 않고. 도망가지도, 인사하지도 않고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무대는 끝났는데 막은 내리지 않고 조명은 꺼지지 않아, 모든 것은 변하고, 나의 세계는 변하지 않아서 나는 변할 수 없어, 유령이 아닐 수 없어, 사람이 될 수 없어.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뺨을 적시고 턱에서 무대 바닥으로 떨어지는, 일그러진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로 나는 당신의 발을 씻길 테니, 이제 그만 당신을 놓아줄게요. 당신은 자유야, 흐느낌으로 떨리는 목소리는 그래도 제대로 의미를 전할 수 있었다. 크리스틴, 당신은 자유야. 아침이 오면 나를 떠나. 이것으로 모든 이야기는 막을 내리게 된다.
" 이상하다. 우리 부장 검사님, 오늘 오전 스케줄 없다고 하셨는데. "
앳된 목소리가 거지같이 해맑다. 서로 스케줄까지 공유하는 사이인가, 아니면 지어낸 말인가. 어느 쪽이든 의중을 알 수 없어 떠보듯 진욱을 흘긋 바라보지만 여전히 그의 표정은, 처음 마주했던 그 표정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지금 생겼어. 동의를 구하듯 바라본다. 어쨌든 선택은 해야 한다, 태석과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손을 받아들일 것인지. 양쪽에서 내밀어진 두 개의 손을, 하나씩 느릿하게 훑어본다. 그 어느 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태도가 항상 짜증이 났다. 다른 선택지가 없는 때에는 그나마의 여유라도 부릴 수 있었는데, 보란 듯이 옆자리를 꿰차고 앉은 꼬마가 정도를 지키지 않고 고개를 들이밀고 있다. 별거 아닌 문턱인 줄 알았는데. 그저 가뿐히 넘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선택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는데,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든 결국 이쪽을 향해서 오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는데. 새로 생긴 작은 길이, 대책 없이 넓어진다. 길을 만드는 방법은 따로 없다, 발자국을 내면 된다.
" 맞아, 스케줄 없어. "
보란 듯이 발목이 걸린다. 태석은 그거 보란 듯 환한 미소를 짓는다. 구겨지는 얼굴을 어떻게 숨길 수가 없다.
충분한 조명으로 어둡지는 않았으나 우리는 어둡다고 느끼고 있었다. 창밖이 항상 밤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어두운 이곳은 우리가 떠돌고 있는 밤이었다. 이 밤이 영원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고 싶었으나 우리의 믿음이 보상받기에는 아직도 아득한 시간이 필요했고 사실, 믿음에 항상 보상이 따르는가, 라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으며 보상을 위하여 믿는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몸을 움츠려야 했다. 숭고한 믿음은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희생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죽어간 성인들을 축복하고 그들의 이름을 기리고 있다. 과연 그것만이 옳은 믿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서 비롯되어 어디로 흘러가는가. 구원을 위하여 우리는 믿는 것인가. 믿기 때문에 구원이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믿는 자에게는 구원이 무조건적으로 내려온다는 것인가. 믿음은 어느 정도로 우리를 선량하게 만들고 굳건하게 만드는가. 우리는 과연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구원받기에 충분한 믿음? 신은 그런 의심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해가 뜨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남은 새벽이다. 보랏빛에서 남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은 가장 어두운 검정을 닮아 있다. 본질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느끼게 되는 것들. 꿈속의 오비토는 오비토였고 꿈속의 카카시는 카카시여서 우리는 과거의 어느 시간에 함께 살아 있었고 그건 분명히, 진실이라는 것을. 그 꿈이 그저 악몽이나 상상 같은 허투루 흘려보낼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어째서 나의 꿈에 네가 이렇게 처절하게, 나오는지를 그저 의아해 했었지. 내가 사실은 너를 이토록 증오하고 있었는지 놀라 하루 종일 너의 눈은커녕 얼굴을 볼 수조차 없어서 피해 다녀야 했다. 내가 너에 대해 아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우리는 그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 같은 나이의 친구였을 뿐인데. 어째서 그런 꿈을 꾸게 되었는지 나의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는 나는 너를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 한동안 죄책감으로 잠드는 것이 두려웠다. 몇 번이나 연거푸 같은 꿈을, 완전히 같지는 않은 그 시간을 엿보게 해 주는 꿈을 꾸고 나서 나는 서서히 느리게 그렇지만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생을 거듭하여 이어져 내려온 악연이다. 너와 나는 몇 겹의 윤회에서 몇 번이나 만나서 지지부진하고 지긋지긋한 악연을 이어 가고 있구나.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삶에도 또 다시 찍혀 내려오는 낙인이구나. 나는 꿈을 꾸는 것이, 그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지독하게 두려워졌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구나. 달아날 수 없구나.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구나.
"끝까지 가 봐야 아는 거야."
"뻔한 이야기를 지겹도록 반복하는데도?"
항상 뻔한 이야기였다. 정의가 승리한다는 어린 시절 동화와는 달랐다. 괴물이 기사를 집어삼킨다. 모든 것이 괴물의 뱃속으로 사라진다. 닥치는 대로 삼켜 버리는 놈은 소화불량에도 걸리지 않는다. 잇새로 아그작 아그작 사라지는 정의. 항상 그 앞에서 멀거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놓쳐 버린 것들. 사라져 가는 것들. 잃어버린 것들.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라고 몇 번을 생각했던가. 이번만큼은 다르다고 몇 번을 다짐했던가. 몇 번을 구르고 일어났던가.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다.
연둣빛, 그리고 간혹 노랗게 빛나는 나뭇잎들. 계속 흔들리고, 움직이고 있다. 이파리 사이로 파란 하늘이 언뜻 보였나, 싶었을 때, 금방 새하얀 햇빛이 쏟아진다. 눈이 따가워 깜빡, 하는 사이 다시 나뭇잎이 흔들리고 하얀 햇살은 다른 곳을 비춘다. 바람결에 쓸린 나뭇잎들이 함께 문질러지면서 쏴아아……, 하는 파도 소리가 났다.
여긴 산인데, 바닷소리가 나. 베로니카와 제너는 고개를 내려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서로의 얼굴에서 기쁨과 흥분을 읽어냈다. 분명 재미있을 거야! 베로니카와 제너는 손을 잡고 조금 더 깊은 숲 안쪽으로 향했다.
어디선가 새 지저귀는 소리가 울렸다. 베로니카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에서 작은 새를 찾기는 어려웠다. 베로니카가 잔뜩 눈썹을 찡그리고 새를 찾는 사이, 제너는 다른 것을 발견했다.
“어, 다람쥐.”
“어디?!”
제너가 가리키는 곳에 다람쥐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작은 동물은 인간에게 들키자마자 후다닥 달아났다. 풀숲 사이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베로니카는 다른 동물들도 찾아보자고 신나서 외쳤다. 청설모, 토끼, 사슴, 여우. 제너는 사슴이나 여우 같은 동물들은 이런 작은 산에 있지 않을 거라고 지적했고, 베로니카는 제너의 뺨을 꼬집다가 놓아주었다.
일단 리본은 그래, 최소한 그럴싸한 변명을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선물할 게 있어서, 그걸 포장하기 위해 한 번 사 봤다고. 디안 블레어는 결코 세심하거나 다정한 성격이 아니었기에 선물을 줄 만한 사람도 없었고, 또 그 사람에게 줄 선물을 예쁘게 포장할 생각은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었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말해야만 했다.
리본은 새빨간 실크 재질의 부드럽고, 은은한 펄이 들어가서 반짝거리고, 마감이 잘 되어 있어서 올이 풀어지거나 결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특별한 코팅까지 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런 고급스러운 리본은, 분명 마호가니 나무나 향나무 같은 선물함을 포장할 때나 쓰일 것이다.
하지만 리본에 대한 변명을 어떻게든 해내도―그것이 상대방을 충분히 납득시킬 수 있는가, 는 둘째치더라도―발각되어버린 나머지 하나. 안대에 대한 변명은 머리를 아무리 쥐어뜯어도 도저히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단순히 깊은 수면을 위해 빛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렇게 화려한 레이스가 달려 있을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레이스는 귀에 걸치는 부분과 안대의 가장자리뿐만 아니라 눈을 덮는 부분까지 이어져 있었다. 분명 이건, ……특별한 경우에 특별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오늘도 M은 사람들이 부탁한 일을 어렵지 않게 해결하고 왔다. 에테르의 일부를 마나로 변환시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너무나 능숙하여 호흡하는 것보다 익숙했다. 그런 일에 대해 사람들은 ‘역시 영웅님’이라고 말하며 칭송하고 칭찬했다. M은 자신을 ‘영웅’이라고 불러 주지 않았으면 했지만 그런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그들은 겸손의 표현이라고 오해하며 오히려 더욱 M을 우러러볼 테니까. ‘빛의 영웅’이니, ‘세계의 구원자’니. M은 그런 대단한 호칭들로 자신을 불러 주는 대신 소중한 사람을 절대로 잃지 않게 해달라고 울부짖고 싶었다. 저 빗속에 대고, 자신에게 속삭이는 하이델린에게, 이 세상에게, 내가 지켜줬으니 그 정도 요구는 해도 되지 않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이 세계를, 나는 지켜야 하니까…… 소중한 그들이 원하니까…… 내가 놓아 버린다면 그들마저도 잃어버리게 될 테니까…….
그때 커다란 손이 덥썩 M을 안아 들었다.
“나는 영웅님의 감기 시중 따위는 사양이라고.”
“그러니까.”
이상하게 날이 참 맑았다. 하늘은 높고, 구름도 없이 파랗고. 나무 그늘 밑은 선선하고 또 좋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어디서 지저귀는 새 소리, 찌르르 우는 풀벌레 소리. 아, 낮잠이라도 한숨 푹 자면 딱 좋겠는걸…… 그런 생각이 드는 볕 좋은 오후였다. 아니, 오전이었나. 아무래도 상관없어. 뺨을 간지럽히는 파릇한 잔디 위에 누워 멍하니 나뭇잎 그림자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올려다보며 에메트셀크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래. 정말 이대로 눈을 감고 푹 자고 일어나면 꽤 기분이 좋을 것 같아. ●●은 그의 곁에 앉아, 양손을 약간 뒤로 빼 땅을 짚은 채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상한 목소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평화롭고 또 아름다운 날에, 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을 얘기했다.
“내가 죽으면 그날 너를 보러 올 테니까.”
악몽의 가장 나쁜 점은, 대부분의 꿈이 그러하지만, 꾸고 있는 동안에는 현실인지 꿈인지 자각할 수 없다는 점일 테다. 일어나고 나면 그것은 꿈이었고 현실이 아니라고 명백하게 알 수 있지만 꿈을 꾸는 동안에는 고스란히 현실이 아닌 현실을 감당해야만 한다. 지금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최악의 재난을 마주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M은 물을 데우고 커다란 머그컵에 커피를 듬뿍 내렸다. 향이 꽤 진했다. 따끈한 머그컵을 양손으로 모아 쥐고 호호 불었다가 한 모금을 홀짝 입안에 머금었다. 쌉싸름하고 달고 진하고 부드러웠다.
M은 만족스러운 한숨을 뱉었다. 두통도 조금 사라지는 것 같았다. 머그컵을 쥐고 식탁 의자를 다시 원래 위치로 돌려놓은 다음 M은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손에 쥔 머그컵에서 커피가 쏟아지지 않게 하려면 신중하게 걸음을 옮겨야 했다. 복도는 이상하게 길었고, 어두웠으며, 차가웠다. 어깨에 걸치고 있는 담요를 다시 움켜쥐어 고쳐 당기고 몸을 덮자, 바닥에 질질 끌리던 담요가 조금 더 올라왔다. M은 문득 고개를 돌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았다. 어둡고, 서늘하고, 고요했다.
자신의 집마저도 맘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악몽은 벽을 뚫고 머릿속을 파고드니까. 그저 잠들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 대비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이었고, 그나마도 거의 쓸모가 없었다. M은 체력이 좋은 편이 아니었고, 체력이 아무리 좋다 한들 사흘 넘게 밤을 새울 수는 없는 법이다. M은 소리 없이 한숨을 뱉었다. 이 저택에서 나는 유령이다. 아니라고 말할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남은 방법도 이것 뿐이잖아? 영웅님.”
“그, 렇긴 한데…….”
그러니까. 에메트셀크는 한 걸음을 더 다가왔고, 뒤로 물러나려던 M은 툭, 하고 벽에 발뒤꿈치가 닿았다. 이어서 어깨와 등도 벽에 부딪혔다. 더 물러날 곳이 없었다. 에메트셀크는 짐짓 자상한 미소를 지어 보였는데, 마치 잡았다, 고 속삭이는 것을 들은 기분이 되었다. M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약간 포기하고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모든 방법을 시도해 보는 게 좋을 테니까. 어쨌든 자력으로 탈출이 불가능하고……. M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에메트셀크는 잘 생각했어, 라고 작게 속삭이고는 M을 번쩍 안아들었다.
방의 목적에 맞게 침대와 협탁, 그리고 무드등이 놓여 있었다. 침대는 충분히 컸다. 루가딘이어도 편하게 뒹굴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사실, 좀 지나치게 컸다. 에메트셀크는 부드럽게 M을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 침대에 부드럽게 M을 눕힌 에메트셀크가 그 위로 몸을 숙였다. 새삼스럽게도, 이런 걸 안 해본 것도 아닌데도. 왠지 낯이 뜨거워졌다. M은 약간 시선을 피했고, 에메트셀크는 M의 침대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 넘겨준 다음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